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14세 요한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* 이등병부터 시작해 최후엔 한 나라 국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지만 애정관계에 있어서는 불우했다. 그의 아내인 [[데지레 클라리|데지레]]는 나폴레옹과 연인관계였지만 나폴레옹이 애 딸린 이혼녀 조제핀에게 빠진 동안 베르나도트와 결혼했다. 후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조제핀의 불륜으로 조제핀과 멀어지자 다시 옛 여인인 데지레에게 접근했는데 데지레는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. 하지만 '''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 불륜을 저지르던 데지레를 끝까지 사랑했다'''. 스웨덴의 섭정으로 있을 때 러시아의 황제 [[알렉산드르 1세]]가 그를 마음에 들어해 러시아의 대공녀와 결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베르나도트는 아내가 있다면서 정중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. 더구나 그 당시엔, 아내 데지레가 북방의 스웨덴의 추운 기후와 풍토, 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파리에 남아서 부부가 긴 별거생활을 했을 때였다.[* 다만 아내가 파리로 돌아가고 스웨덴에서 사실상 홀몸으로 지낼 때 스웨덴 출신 정부를 두었는데, 그 정부가 그의 양부인 칼 13세의 정부였던 여자라...] 그 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베르나도트는 왕이 된 후 자신의 아내를 스웨덴으로 데려왔다. 그러나 데지레는 마지막 유언에 그의 남편이 아닌 나폴레옹의 이름을 불렀고, 그녀의 침실 안 베개 밑에는 예전에 나폴레옹 앞으로 보냈던 수많은 연애편지들이 남아 있었다. * 젊은 시절에는 왕정에 격렬히 반대하는 자코뱅 파였는데, 야사에 의하면 베르나도트가 죽은 후 몸을 검시해 보니 '''"왕에게 죽음을!"'''이라는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. 훗날 그가 왕이 되는 걸 생각해보면 아이러니. 그러나 다른 설에 따르면 이것은 몇십년 후에 연극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. *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상하관계가 엄격하기로는 수위를 달리는 곳이고, 스웨덴은 그 반대라고 한다. 실제로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할 때 스웨덴어가 서툰 탓에 단어를 잘못 말하자 스웨덴인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고, 프랑스에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베르나도트는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.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무사히 극복하고 스웨덴을 잘 다스렸다. 그는 "스웨덴에 나보다 훌륭한 군인이 100명 있다고 반박하지 않겠소. 그러나 '''경제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뛰어나오.'''"라고 했다고 한다.[* 군 경력만 가지고 있던 사람이 저렇게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게 베르나도트는 '''전통적인 농업 강국'''인 프랑스 출신이라 당시 스웨덴의 경제가 왜 쇠퇴했는지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. 프랑스와 비교해 볼 때 당시 스웨덴은 인구가 심각하게 적었는데, 자세히 들여다보니 프랑스에 비해 [[농업]]이 심각하게 후진적이었고, 그로 인해 인구가 늘지 않고 인구가 늘지 않으니 농업을 포함한 다른 산업이 쇠퇴하는 [[악순환]]이 벌어졌던 것이다. 그래서 제일 먼저 한게 왕실 농업학회를 설립해서 농업 선진화를 먼저 추진한 일이었다.] 그의 통치 후반에는 스웨덴의 인구가 노르웨이를 빼고도 과거 스웨덴과 핀란드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고 한다. 또한 무력 사용을 싫어하여, 후의 노르웨이 정벌에서도 박살낼 수 있던 것을 싸움을 최대한 피하고 자치권을 상당히 인정해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했다. 이는 그의 즉위 연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. > 나는 전쟁을 가까운 거리에서 봐왔습니다. 나는 그 모든 참상을 잘 압니다. 외국 땅에 뿌려진 그 자식들의 피에 대해 조국이 위로받을 정도의 정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.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그토록 많은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또 그 무적의 군대에 둘러싸인 위대한 프랑스 황제]]가 평화의 올리브 가지 뒤에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봐왔습니다. 그렇습니다, 여러분, 평화야말로 현명하고 계몽된 정부의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목표입니다. 국력과 독립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국가의 영토 넓이가 아닙니다. 그것은 그 국가의 법과, 통상과, 산업과, 그리고 무엇보다 그 국민 정신입니다. * 말년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을 통제하기도 해서 인기가 꽤 식었지만, 그럼에도 스웨덴 국민들은 그를 여전히 좋아했고 꼭 업적이 아니더라도 일개 사병에서 원수가 되었다가 왕까지 된 그를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. * 다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. 젊은 시절 별명이 '각선미 하사'. 위 초상화만 봐도 몸관리를 철저하게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. * 노르웨이의 수도 [[오슬로]]의 칼 요한 거리(Karl Johans gate)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. [[오슬로 왕궁]]과 오슬로 대성당이 있으며, [[에드바르 뭉크]]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칼 요한의 저녁(Aften på Karl Johan)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. * 사생아가 두 명 있었다. * 서양의 특성상 [[연좌제]]를 적용 받지 않은 관계로 베르나도트의 형제들은 오히려 [[남작]] 작위를 받았으나, 1966년에 대가 끊겼다. * 나이가 들어 가늘어진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가발을 착용했다.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젊은 시절엔 풍성한 검은 머리를 자랑했다. * 식사를 굉장히 빨리 해서 동석한 사람들이 제대로 먹기도 전에 음식 서빙이 끝나버리고는 했다. * 러시아 황제 [[알렉산드르 1세]]의 황후 [[바덴의 루이제]]는 평민 출신의 베르나도트가 세운 베르나도테 왕가를 '다시 아름다워진 유럽의 불쾌한 얼룩'이라고 불렀다. * 저녁형 인간이었다. * 치세 동안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것은 1842년 [[오스카르 1세|오스카르 왕세자]]의 주도로 시작된 국민학교 제도이다. [[분류:스웨덴 국왕]][[분류:노르웨이 국왕]][[분류:프랑스 제국 원수]][[분류:베르나도테 가문]][[분류:1763년 출생]][[분류:1844년 사망]][[분류:포 출신 인물]][[분류:리다르홀름 교회 안장자]][[분류:화폐의 인물]][[분류:프랑스계 스웨덴인]][[분류:스웨덴으로 귀화한 인물]][[분류:유럽의 섭정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